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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연재소설 [길 끝에서 꽃을 줍다 21회]

2026-11-06 19:00 | 입력 : 김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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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회

강주보살이 가져다 놓은 화선지는 아직 반이 넘게 그대로 남아있었다. 우명은 가장자리가 거진 말라버린 벼루에 몇 방울 물을 떨어뜨렸다.

등 긋기는 우선 진하게 먹을 가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금박 종이로 단정하게 싼 먹의 가장자리를 질이 잘난 벼루로 가져가는데 문소리가 났다.

“제가 갈아드리지요.”

강주 보살이 차와 과일 접시를 옆에 놓으며 사뿐히 우명 옆에 와 앉았다.

우명은 얼른 구부렸던 다리를 풀어 왼쪽 다리는 바닥에 뉘고 오른 쪽은 무릎을 세웠다. 기본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아야 함을 강주 보살로부터 몇 번이나 지적을 당했건만 자꾸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보살의 손이 닿자 사각 벼루 위를 기다란 먹 막대가 둥글게 타원을 그리며 돌았다. 먹을 가는 보살의 손은 주름이 많은 나이든 손이었지만 푸른 실핏줄이 선명하도록 흰빛이었다.

“차 드시고 하세요.

보살은 여전히 먹과 벼루에 눈을 둔 채 목소리만 우명 쪽으로 건넸다.

“잘 마시겠습니다.”

우명은 찻잔을 들었다. 맛과 향이 독특한 차였다.

“향이 너무 좋은데요 무슨 차예요?”

먹을 가는데 만 온 힘을 쏟는 듯 몸을 굽히고 꿇어앉아 있던 보살이 슬쩍 우명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구기자도 들어가고 당귀랑 마른 솔잎도 좀 들어갔어요. 백작약이랑 육모초도 들어가고 이름모를 약초도 섞여있지요..”

몇 번을 보아도 보살의 얼굴은 원래 그런 듯 표정이 굳어있었다.

“차가 아니라 보약이네요?”

“그래요, 무주 스님도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보살님, 이것저것 너무 많이 섞으면 보약이 몸의 어디를 찾아갈지 몰라 그냥 뒷간으로 나온답니다 그러셨어요.”

강주 보살의 얼굴에 웃음이 이는 걸 우명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무슨 실수라도 한 듯 활짝 펴지며 밖으로 새어나오던 웃음을 강주 보살은 황급히 거두어 들였다.

우명은 그런 보살의 모습이 방금 마신 차의 뒷맛처럼 쌉싸름하기만 하였다.
우명은 완성된 그림을 옆으로 옮겨 놓고 또다시 화선지 한 장을 탱화 그림이 그려진 바탕 위에 얹었다. 붓끝에 먹을 먹혀 화선지로 가져가는 우명의 손등 위로 안이 들여다보일 듯 맑은 빛의 손 하나가 겹쳐졌다.

“이렇게 손에만 힘을 주게 되면 몸의 균형이 깨어져서 필력이 약해지지요. 왼손은 화선지를 누르고 단전 호흡을 해서 일단 숨을 멈춘 뒤에 붓을 곧추세워 필봉으로 선을 그으시면 돼요.”

강주보살은 설명하면서 직접 자세를 보여주었다.

“뭐든 마찬가지겠지만 안정되고 편한 자세여야만 오랜 시간 불화 작업을 할 수 있어요. 작업을 하는 자세는, 그림을 그리는 작업의 자세를 넘어서 부처님 앞에 정진하는, 구도자의 자세여야만 한답니다. 원래 그림을 그리던 분이라 잘하시겠지만 제 말을 새겨 두면 본 그림 그리실 때 도움이 될 거예요.”

우명은 강주 보살이 시키는 대로 일단 숨을 멈추고 붓끝으로 선을 그어나갔다. 보살의 말대로 붓끝에 조금씩 힘이 실리는 게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다시 한 장을 완성해서 옆으로 옮겨 놓자 보살이 다소곳이 먹을 놓고 우명을 쳐다보았다.

“언제, 본 불화를 시작하게 되는지 궁금하시지요?”

숨은 마음이 들켜버린 것 같아 우명이 보살을 쳐다보며 훅, 웃음을 웃었다.

“여기를 와서 보니 제가 하고 싶다고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싶었어요.”

이번엔 우명을 쳐다보는 보살의 얼굴에서 활짝 주름이 펴지면서 웃음이 베어 나왔다.

“저는 오랫동안 무주 스님을 모시고 있었지요. 무주 스님은 불화 중에서도 종이나 비단이나 베를 바탕감으로 쓰는 탱화를 주로 그리셨답니다.”

무주스님을 모셨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강주보살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있었다.

“ 탱화에 쓰일 깨끗한 비단이나 베를 구하려고 제가 전국을 헤맨 적도 있답니다. 예전엔 바탕감을 나르는 사람도 고르고 골라서 아무한테나 시키지도 않았어요. 이 백 년 전쯤에 그려진 옛날 탱화를 보면 탱화 밑 부분에 바탕감 시주자 이름까지 기록돼 있어요. 그만큼 바탕감까지도 중요시 한 걸 알 수 있지요. 지금이야 그렇게 까지는 안 하지만 이번 탱화도 제가 안동까지 가서 구해 온 베에다 그리신 것이랍니다.”

하지만 금세 강주보살의 눈이 가늘게 잦아들었다. 무주스님이 떠올랐던 모양이었다. 우명은 목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말을 참느라 입술이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무주 스님 어떤 분이셨어요?”

강주 보살의 기색을 살피며 우명이 조심스레 말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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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명 |2024.11.1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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