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
우명은 버스가 정류장에 닿자마자 날아갈 듯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곤 가게로 달려갔다. 라면, 음료수를 사고 과자를 샀다. 바로 옆의 제과점에선 크림이 잔뜩 든 빵을 봉지에 넣었다.
거의 매일 해기와 만나고 있었지만 크로키 레슨을 시작한 후론 일요일은 오후에만 잠시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다락방에서 해기와 일요일의 느긋한 오전시간을 보내겠구나 생각하니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토끼뜀을 뛰듯 뛰어서 우명은 해기 집의 대문 앞에 닿았다. 그리고 경쾌하게 벨을 눌렀다. 두 번 세 번 몇 번을 계속 눌렀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우명은 가방의 주머니를 뒤져 언젠가 해기가 자신에게 준 열쇠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 열쇠로 문을 열었다.
주인집 여자가 알아채고 잔소리를 할까싶어 조심조심 쇳소리를 죽이며 한참만에 문을 열었다. 부엌문도 방문도 열려있었지만 해기는 없었다.
우명은 라면부터 싱크대에 풀어놓았다. 그리고 냄비를 찾아 렌지에 물부터 올렸다. 해기가 들어오면 깜짝 놀라게 해줄 참이었다. 그리고는 빵 봉지를 들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버릇처럼 나무 창틀에 얼굴을 기대고 아무 생각 없이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시멘트 틈에는 푸른 이끼가 자라고 있었고 시멘트가 부서진 곳엔 흉물스럽게 검은 흙바닥이 패인 채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과자봉지를 뜯어 조각하나를 손에 들고 마악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이었다.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해기였다. 분명 어디선가 해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명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주인 여자의 방이었다. 그곳에 해기가 있었다. 알몸을 훤히 드러내고 누운 여자의 젖무덤 위에 얼굴을 파묻고, 해기가 거기 있었다. 우명이 들은 소리는 그들의 웃음소리였다.
우명은 나무 창틀에 코를 박고선 옆으로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그대로 붙박여 있었다. 우명이 기대고 있던 나무 창틀에서 더 이상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곰팡내였는지 나무 썩는 냄새였는지 그 순간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서로를 탐하는 그들의 동작이 느려질 때까지 우명은 꼼짝하지 못하고 나무 창틀에 코를 박고 그렇게 있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몰랐다. 빨리 해기가 여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엉겨 잠이 들었는지 좀체 움직일 모양새가 아니었다.
우명은 다락방에 엎드려져 있는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한 떨림은 분노나 배신감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받아들이고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영역의 한계를 넘은, 알아서는 안될 영역을 엿보아 버린,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헉헉 숨이 막혀왔다. 주체할 수도 억누를 수도 없이 가슴이 뛰었다.
우명은 그 떨림을 막아보고자 한껏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우명이 할 수 있는 일은 눈을 감는 일 밖에 없었다. 방금 본 것을 다 지워버리기라도 할 듯 우명은 있는 힘을 다해 눈을 꼭 감았다.
눈을 불끈 감아버림으로 해서 지워버릴 수 있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 하지만 지워진 듯 한 순간 눈앞이 깜깜하게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앞이 다시 훤해지면서 재생되는 필름처럼 방금 보았던 장면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몸서리쳐지며 소름이 돋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명은 얼굴의 근육을 풀고 감았던 눈을 다시 떠야만 했다. 눈을 뜨자 언제나처럼 여전한 다락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변한 건 없었다. 단지 소용돌이가 일고 있는 건 우명의 마음속일 뿐, 눈에 보이는 그 무엇도 아무런 변화 없이 제자리에 다소곳이 정돈 되어있었다.
다락방에 존재하는 모든것들이, 여전한 듯한 천연덕 스런 모습으로, 우명을 기만하며 버틴 날들이 얼마였을까. 우명은 다락방의 벽지에 수 놓여 있는 국화무늬가 참을 수 없었다. 구토증이 솟구쳐 올랐다. 저 가슴 아래로부터 목 줄기까지 울컥울컥 신물이 넘어왔다. 우명은 쿨럭쿨럭 신물이 올라오는 입을 틀어막으며 다락방을 내려왔다.
--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