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갑자기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가리고 조심조심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너무 밝은 햇살에 눈이 어려 계단이 시야에 잘 잡혀들지 않았다.
바위에 걸쳐있는 암자답게 양 사방이 하늘을 향해 뻥 뚫려있었다. 똑바로 선 정면에 하늘을 배경으로 구름이 둥둥 떠 있었다.
우명은 어지럼증이 일었다. 한 여름이었는데도 어디선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무뚝뚝해 보이던 공양주보살이 저녁 공양을 하고 가라고 옷깃을 붙들었다. 보통 사람들의 저녁 시간으로는 무척 이른 시간이었지만 우명은 형직과 나무 의자에 앉아 이른 공양을 했다.
“야, 내가 오늘 멋진 저녁 식사를 사려고 했는데 정말, 아깝다..”
“하하 무슨 소리야, 내가 사려고 했는데.. 정말 아쉬운 일이야..”
우명은 형직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좋은 기분으로 차에 올랐다. 빈 고속도로를 달려 한 시간이 걸린 곳이니 돌아가는 길은 족히 두 시간은 잡아야 할 것이었다.
“저녁사면서 말야, 나한테 술도 한잔 사주려고 하지는 않았었니?”
좋은 기분이 남아 형직이 또 한마디 농담을 건넸다.
“왜 아니라구? 술이라면 얼마든지 사줄 수 있지. 단, 여기서만.”
“음..그래? 그럼, 술 실컷 얻어 마시고 차를 놔두고 한번 가 봐?”
“하하 안돼. 이제 시간 지났어.”
차창으로 스며든 붉은 노을 빛에 취한 듯 두 사람은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연신 웃음을 웃었다.
잠시 웃음이 사그라들자 형직이 입을 열었다.
“우명씨, 내가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거 알지?”
“모르겠어.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잘 해내고 나면 고마워 해 줘.”
우명은 형직의 연구실에서의 소란이 떠올랐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형직씨 책상 위에 있던 사진 말야..”
“아, 해기사진?”
갑자기 우명의 얼굴에 벌겋게 열이 올랐다.
“응..맞구나, 난 또 잘못 봤나 해서”
우명은 옆 창으로 얼굴을 돌린다. 형직에게 마음을 다 들켜버린 것 같아 얼굴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 사진 사진첩에서 나오길래 최근에 가져다 놓은 거야. 혹시 그 옆 액자에 있는 우리 와이프 사진 봤어?”
우명은 앞 유리창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와이프 하피스트야. 방송국 교향악단 하피스트로 있어. 지금 유학간 것도 방송국에서 뒷바라지하는 거야. 내가 아내를 처음 본 게 아내의 첫 하프 연주회에서 였는데 한 번보고 완전히 반해버렸지. 장인 될 분이랑 같이 있던 자리였는데. 장인어른이 대학 시절 우리 과 지도교수였거든. 참, 우명씨도 기억나지? 김진락 교수.”
대학 일 학년 때 김진락 교수한테서 우명은 교양 사회학 강의를 들었었다. 얼굴이 워낙 길어서 별명이 안소니 퀸이었던 교수였다. 그의 딸과 결혼을 했구나. 우명은 얼굴이 갸름한 그의 아내의 얼굴을 그려본다.
“하프 연주도 첼로처럼 다리를 벌인 채 의자에 앉아 연주한다는 걸 처음 알았어. 내가 언제 하프 연주하는 걸 봤어야 말이지. 그 큰 하프를 다소곳이 무릎에 기대고 연주를 하더군. 무게도 만만치 않을텐데 말야. 하프를 무릎에 기대 놓고서 양손으로 실 자락을 비비듯 현을 연주하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 막 빠져들더라구.”
“악기 연주하는 여자들 멋있잖아.”
우명은 목선이 둥그렇게 파진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긴 머리칼을 위로 틀어 올린 채 하프를 연주하는 형직의 아내를 상상해 보았다. 그녀는 귀족처럼 커다란 보석을 목에 걸고 어깨까지 닿일 듯한 기다란 귀걸이를 걸었을 것이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