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다른 곳과 달리 절 마당은 아주 좁았다. 겨우 올라선 절 마당은 절의 입구일 뿐 법당이나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가려면 또 계단을 올라야 할 일이었다.
외양으로 보기엔 절 전체가 경사진 언덕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가장 많아 보이는 게 위로 뻗은 돌계단이었고 그것들은 겉보기에도 몹시 가파르기만 했다.
형직은 보란 듯 성큼성큼 한달음에 계단을 올랐다. 우명은 계단 옆으로 죽 둘러쳐져 있는 밧줄을 잡고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법당이 있는 곳으로 올라서니 계단 아래의 절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바로 아래쪽으로 눈을 내려보면 수없이 많은 바위들을 향하여 조용히 암자가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림에 대한 욕구가 일었다. 굽이쳐 흐르는 물결이 일순간 정지된 듯한 바위들의 군상을 자신의 손으로 그려내고 싶다는 욕망. 정지된 듯한 한 순간의 고요와, 한 순간의 정적과, 묵념과도 같은 정지된 침묵을 자신의 손으로 한 오라기 한 오라기 실을 잣듯 그려내고 싶은 충동에 우명은 몸을 떨었다.
이제껏 단 한번도 어떠한 자연의 풍경 앞에서 그림에 대한 충동을 느껴 본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러한 충동을 표현하거나 그러한 충동으로 캔버스 앞에 앉는 친구들을 우명은 경멸했었다.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감성이란 무모한 것이다. 자연으로부터의 감흥 때문에 붓을 든다면 그 그림은 무가치한 것이다, 라고. 순간의 감흥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아내기 위한 도구로선 ‘사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지만 우명의 머리엔 이전의 생각들이 모두 한 순간 지워진듯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아주 단순한 빛의 조절과 결코 다채롭지 않은 색으로도 우주 삼라만상을 그림 한 장에 모두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색체며 빛의 조절을 떠나 지금 자신이 갖는 느낌을 그대로 화폭에 옮겨놓는다면 그것이 색이 되고 그것이 빛이 될 것 같았다.
“우명씨.”
법당 문을 열고 서 있는 형직을 보고서야 우명은 번뜩 정신이 들었다. 아쉬운 듯 한번 더 아래로 내려다보고는 얼른 법당으로 뛰어들었다.
밖의 햇빛 탓인지 법당은 사물의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형직은 법당의 사방을 돌아가면서 초에 불을 켰다.
자세히 보니 벽마다 불화들이 걸려있었다. 그저 누군가의 뒤를 따라 드나들던 절간의 모습과 지금 우명의 눈에 보이는 모습들은 확연히 달랐다.
단 한번도 불상 뒤에 그림이 있다는 의식을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러고도 그림을 공부했답시고 그림을 가르쳤다니 스스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우명은 형직의 손짓을 따라 불상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어느 절에서나 볼 수 있는 금 불상의 뒷벽에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다. 가장 큰부처 상이 그림의 상단 중앙에 가부좌상을 틀고 앉아있고 그 아래와 옆으로 다른 수많은 부처들이 모여있었다.
“이 불화가 그 유명한 ‘영산회상도’야. 뭐 하는 그림 같아 보여?”
얼굴을 들이대고 찬찬히 그림을 살피는 우명에게 형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큰부처를 구경하러 모여든 작은 부처들인가? 작은 부처들이 큰부처를 떠받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님 큰부처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작은 부처들을 그린 그림인가?”
말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니 형직이 합장을 한 채 절을 하고 있었다. 회색 양복을 입은 형직이 마치 승복을 입은 스님 같아 보였다. 합장한 손을 가슴에 단정히 붙이고 차분하게 무릎을 굽히고 앉는 형직의 몸짓은 정숙하다 못해 경건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우명은 다시 찬찬히 불상뒤의 그림으로 눈을 가져갔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