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회
하루를 비운 방송국은 흡사 도연이 그 프로를 수락하는 양으로 분위기가 흘러가 버렸다. 도연이 맡아 있던 프로에는 새 피디와 새 작가까지 내정되고 프로그램 이름까지 새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제1 라디오 공개홀 2시’ 책상 위에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라디오 공개홀에서 만나자고 한 걸 보면 제작실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데 왜 문자도 아니고 쪽지일까? 생각하며 공개홀로 내려갔다.
공개 방송이 없는 라디오 공개 홀은 언제나 텅 비어 있다. 줄을 맞춰 나란히 진열된 의자들 너머 한 구석에 누가 서 있었다. 장피디였다.
“미안해요, 오라고 불러서.”
불러서, 불러서, 라는 말이 메아리처럼 공개홀 안을 울리며 돌아다녔다.
“용건만 이야기하세요.”
도연은 장피디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같이 작업하죠. 내가 사과할게요.”
하세요, 하세요, 할게요, 할게요... 말들은 꼬리만을 끌고 이리저리 공개홀 안을 떠돌아다닌다.
“특집다큐 쪽으로 옮기려 한다는 말, 국장님한테 들었어요. 그쪽은 주로 해외물이라 힘든 일 많아요. 그리고 도연씨 다른 쪽으로 가면 우리 프로 할 작가가 없어요.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 거 잘 알지만 그냥 다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해요.”
장피디는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낸다. 손바닥 만 한 갈색 병의 위스키였다. 작은 뚜껑을 열더니 한 모금 홀짝 삼킨다.
“왜 그래야 하죠?”
도연의 말에 장피디는 그냥 씨익 웃었다.
“난 그 프로 하겠다는 생각 애초부터 없었어요.”
장피디는 빤히 도연을 쳐다보았다.
“일단 며칠 생각해 볼게요. 제작1부 특집 재편성 건 때문에 다음 한 주 동안은 그 작업 해야 해요. 일하면서 생각해 볼게요.”
돌아서려는 도연에게 장피디가 다가왔다.
“그냥 같이 하겠다고 여기서 말해 주면 안돼요?”
도연은 그런 장피디로부터 몇걸음 뒤로 물러선다.
“저도 부탁 하나 하죠. 같이 하게 되든 아니든 전처럼 그렇게 대하시면 좋겠네요. 달라져 보이는 모습 왠지 제가 부담스러워요. 말투나 행동들이나...”
“그 말, 같이 작업하겠다는 가능성으로 들을게요.”
도연은 대답하지 않고 먼저 공개 홀을 빠져나온다. 들을게요, 들을게요, 라는 유령 같은 울림이 미처 뒤따라 나오기도 전에 계단을 뛰어올랐다.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사람이 힘들어서 일하는 곳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을 힘들어한다는 것은 아직도 그만큼 타인에게 애정을 품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타인에 대한 기대가 전제되지 않는 한에는 누구로부터 힘들다거나 누구로 인해 괴로운 일은 잘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어디 갔다 와? 진 선배. 핸드폰 벨이 계속 울리던데..”
라디오국 한은주가 녹음실로 들어가는 도연을 잡는다.
‘나예요. 전화 좀 해줘요.’
가슴속에 갑자기 거센 바닷바람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핸드폰에 녹음된 목소리는 그의 것이었다. 도연은 핸드폰을 끈다.
순간적인 것에 매달릴 만큼 여유롭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어차피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었다. 순간이 아닌 그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지나고 나면 그만일 그런 것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 사람보다 일은 정직하다. 열심히 매달리면 매달리는 만큼 그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니까.
“언니, 요새 정말 얼굴 잊어버리겠어, 뭐가 그렇게 바쁜 거야.”
도연이 자료실로 들어서자 서명희가 호들갑을 떨었다.
“누가 나 찾아도 모른다고 해. 책 조금만 읽고 나갈게.”
도연은 뽑아 온 커피를 서명희의 책상 위에 놓고 서고로 들어간다.
어디선지 모르게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어떻게 들으면 피리 소리 같기도 하고 어떻게 들으면 노랫소리 같기도 한, 아름다우면서도 애잔한 느낌이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한 소년이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소년이 불고 있는 게 뭔가 싶어 자세히 보려고 도연은 눈을 부릅떴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이경희작가 프로필
중앙일보에 장편소설 '제8요일의 남자'를 연재했으며 단편소설로는 '작약' '연의기록' '전생을 기억하는 여자' 등 다수를 발표했다.
제19대 국회의장단 연설문기획관을 지냈으며, 국회도서관 국회보 편집위원, 일간지 문화부기자, 경기도 공무원교육원 겸임교수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JTBC 드라마 '품위있는그녀' 원작소설 1,2와 예술치유 에세이 '마음아 이제 놓아줄게' 등이 있으며, 조선일보 조선 PUB에 문화 칼럼을 연재, 스카이데일리에 ‘초대받은 여자’ 장편소설을 연재했다.
*이경희 작가의 오피니언 ‘전문가의 시선’ 코너에서는
책과 영화, 음악, 드라마 등등의 작품과 더불어 종교와 역사 이야기를 더해 소소한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