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언니, 왜 그래 정말. 울지 좀 말아라.
모르는 목소리 하나가 귀에 들어온다. 누워 있는 여자가 둘, 그 옆에 앉아 있는 여자가 하나, 그 뒤로 실크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커튼이 펼쳐져 있다. 연초록 줄무늬가 나란히 그 실크 레이스 안으로 뻗어 있었다.
언젠가 아이의 방에 저런 커튼을 쳐 놓았었는데 도연은 낯선 곳에서 만나는 커튼의 낯익음이 혼란스럽다. 혼자 나가실 수 있겠어요? 슬리퍼를 끌며 간호원이 문소리를 낸다.
어지러움이 훅, 방을 한바퀴 돌았다. 온 속을 뒤틀며 헛구역질이 올라온다. 도연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
언니, 그만 울어라, 왜 여기서 울고 그래. 커튼으로 가려진 옆 침대에선 누군가 연신 울음을 달래고 있었지만 여자는 울음을 그칠 줄 모르고 큰 소리를 낸다. 소독약 냄새가 역하게 속을 뒤집었다. 두어 번 헛구역질을 하고는 도연은 옷을 입었다.
옷을 여미었지만 밖은 조금 추운 날씨였다. 자, 눈을 감고 하나, 둘...열까지 속으로 세어 보세요, 라는 말을 들은 것까지만 기억이 난다. 손등에 꽂힌 링거가 좀 아프다는 생각도 잠시 그 다음은 없었던 일처럼 모두 지워져 버렸다. 하지만 그 대가를 지불하기라도 하듯 그 외의 기억들은 머리를 흔들수록 더욱 선명하게 뇌리에 박혔다.
택시이, 도연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차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말이 되어 나오질 않고 입안에서만 뒹굴었다. 택시이, 도연은 가로수에 몸을 기대고 팔을 뻗었다. 하지만 팔도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제대로 몸을 놀리지도 못하고 도연은 가로수에 기대고 서서 헛구역질만 연거푸 해대었다.
아이는 학교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린 아기를 엎듯 제 등치 만한 가방 하나를 등에 업고 윗몸은 거의 젖히다시피 한 자세였다. 교복 치마가 덜렁 무릎 위로 치켜올려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언뜻 보여진 아이의 눈빛은 초점이 없었다.
또래의 아이들이 무엇을 먹거나 친구랑 이야기를 하며 앞을 지나건만 아이는 아무 동요 없이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서 있었다. 도연도 아이처럼 창 밖으로 목을 내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옅은 구름들이 붉은 기운을 받으며 넘어가는 해를 감싸고 있었다. 도연은 현주를 선뜻 아는 척을 못하고 그대로 차에 앉아 있었다. 아이는 목이 아프지도 않은지 박힌 듯 움직이지 않고 그렇게 서 있었다.
해가 지는 모습은 때로 묘한 절망감을 준다. 배속이 싸르르 쓸려 내려가는 그런 아픔 같기도 하고 후련함 같기도 한. 차 클랙션이 서너 번 울리도록 아이의 눈빛은 초점을 찾지 못했다.
하늘 참 예쁘다, 그치? 도연은 일부러 경쾌하게 인사를 건넨다. 아이는 차를 타고도 업은 가방을 그대로 짊어진 채 창 밖만 내다보았다.
현주야, 엄마한테 얼굴 좀 보여줘봐.
현주는 느릿느릿 얼굴을 돌려 초점 없는 눈으로 운전하는 도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거센 바람이 몰아치고 지난 것처럼 현주의 얼굴은 황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이는 잠시 도연 쪽으로 얼굴을 돌리는가 싶더니 다시 앞을 향해 못 박히듯 고쳐 앉았다. 긴 머리가 아이의 옆얼굴을 가려 버려서 제대로 아이의 표정을 살필 수가 없다.
이제 학교로 전화하지마.
한마디도 할 것 같지 않던 현주의 목소리에 도연은 오른쪽 깜박이를 켜고 갓길로 차를 세운다.
왜... 선생님이 뭐라고 그래?
도연은 가슴이 쿵 떨어진다. 지난번 만났을 때도 현주는 사소한 일에 예민함을 드러냈었다. 현주는 도연의 말을 못들은 척 시큰둥한 표정으로 어깨에서 가방을 내린다. 조그만 현주의 무릎 위에 덜퍼덕 놓인 가방은 아무리 봐도 현주보다 더 커 보이기만 했다.
‘달링 알 러브 유, 달링 알 러브 유’
현주는 덩치 큰 가방을 싸안고선 거기 달린 작은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언젠가 백화점에서 도연이 사준 것이었다. 꼬마 악마, 라는 닉네임이 붙었던 걸로 도연은 기억한다. 온통 까만 색이어서 그 이름이 썩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가졌던 것 같다. 인형은 현주가 손을 댈 때마다 ‘달링 알 러브유, 달링 알 러브유’ 기계 음으로 외쳐 대고 있었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이경희작가 프로필
중앙일보에 장편소설 '제8요일의 남자'를 연재했으며 단편소설로는 '작약' '연의기록' '전생을 기억하는 여자' 등 다수를 발표했다.
제19대 국회의장단 연설문기획관을 지냈으며, 국회도서관 국회보 편집위원, 일간지 문화부기자, 경기도 공무원교육원 겸임교수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JTBC 드라마 '품위있는그녀' 원작소설 1,2와 예술치유 에세이 '마음아 이제 놓아줄게' 등이 있으며, 조선일보 조선 PUB에 문화 칼럼을 연재, 스카이데일리에 ‘초대받은 여자’ 장편소설을 연재했다.
*이경희 작가의 오피니언 ‘전문가의 시선’ 코너에서는
책과 영화, 음악, 드라마 등등의 작품과 더불어 종교와 역사 이야기를 더해 소소한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