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회
현주를 데리고 여행을 다녀와야겠다고 도연은 생각을 한다.
“화났어요? 왜 말을 안해요?”
무슨 꿈이라도 꾸듯 밖을 내다보고 있는 도연을 그가 흔들었다. 차는 공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아니 근데 지금 어디로 가요? 나 집에 먼저 들러야 해요.”
그는 도연의 말을 못 들었는지 계속 속력을 내며 달렸다.
“집에 가야 한단 말예요.”
도연이 그의 팔을 잡았다.
“지금 집 들를 시간 없는데, 어쩌지? 지금 빨리 달려가야 비행기 탈수 있어요.”
“ 그럼 난 정말 못 가요. 이번엔....혼자 다녀오세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때는 꼭 같이 갈게요. 정말 난 지금 이렇게 여행을 갈 상황이 아니에요.”
이제껏 이런 그의 행동은 처음이었다.
혼자 여행을 계획하고 혼자 일정을 잡은 건 이해가 된다 치더라도 준비할 시간은 도연에게 주었어야 했다.
“지금 속으로 나 욕하고 있구나? ”
빨간 신호등 앞에 차를 세우고 그는 도연의 옆얼굴을 쳐다보며 혼자서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장난이 아니라면서 이런 식으로 여행을 가는 사람이 어딨어요? 집 가서 준비해야 할 것들 많다구요. 시간 안되면 다음 비행기를 타든지, 그래 다음 비행기 타면 되겠네. 다음 비행기 타요.”
“ 그럴까요?”
그는 장난스레 다시 껄껄 웃었다.
“말해 봐요. 집에서 챙겨와야 하는 게 뭐가 있는지. 사흘 동안 지내는데 뭘 그렇게 많은 준비를 해야 해요? 어서 생각해 봐요, 뭐가 필요한지.”
도연은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옷이며 화장 도구들을 떠올린다.
“ 음.. 내가 알아맞혀 볼까요? 화장품들, 옷, 세면 도구, 그거 말고 없네 뭐. ”
그는 도연을 놀리기라도 하듯 연신 장난기 담긴 목소리였다.
“난 수염은 안 나니까 면도기는 필요 없죠. 치약, 칫솔은 있을 거구...”
“아 수염 안나요? 아참 여자들은 수염안나지...”
“왜 계속 장난이죠?”
도연은 눈을 흘긴다. 핸드폰 충전코드도 가져와야 하고 화분에 물도 주고 와야죠. 오늘은 탭도 집에 두고와서 그것도 가져와야하고.. 문단속도 제대로 해야하는데..“
도연은 볼멘소리를 했지만 그는 여전히 기분 좋게 싱글거리고 있었다.
”핸드폰 충전코드는 편의점에서도 구입할 수 있고 옷이랑 화장품들은 쇼핑 몰에서 사면되고, 또 뭐가 있을까?“
그 사이 차는 공항에 닿았다.
”제주도에도 사람 살아요. 나 하나만 믿고 그냥 따라나서 주면 안돼요? 내가 지금 바라는 건 그건데. 그냥 내가 이끄는 게로 와 주면 안돼요? 내가 늘 이러는 사람아닌 거 알잖아요.“
할말이 없었다. 서류 뭉치를 한가득 가방에 안고 도연은 그의 손에 이끌려 비행기에 올랐다.
”화장품 살 때 루즈는 붉은 빛이 많은 걸로 사요. 음..그리고 아이샤도우는 연 하늘색, 아, 그리고 긴 머리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핀도 사야지.“
비행기 속에서 그가 도연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이에요? 나, 늙어 보여서 그래요?“
도연의 말에 그가 큰소리로 웃는다.
”아뇨. 음, 솔직히 말하자면.... 도연씨가 아직 한번도 내 여자였다는 느낌이 없어서. 물론 한번도, 라는 말은 어폐가 있는 말일 테지만. 항상 같이 있는 순간에도 잠깐 나들이 나온 사람처럼 내게 흠뻑 와 닿지가 않아서 자꾸만 옆에 있어도 멀게 보이거든요.“
그말이 틀리진 않았다. 갑자기 도연은 할말을 잃었다.
”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그런 느낌이 싫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 여자란 거 확인하고 싶다면... 그말 이해 돼요? 붉은색 입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요구하면 하면 나를 위해서 들어주는, 그것을 바라는 거죠. 단 제주도에서의 사흘 동안만이라도. “
-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이경희작가 프로필
중앙일보에 장편소설 '제8요일의 남자'를 연재했으며
단편소설로는 '작약' '연의기록' '전생을 기억하는 여자' 등
다수를 발표했다.
제19대 국회의장단 연설문기획관을 지냈으며,
국회도서관 국회보 편집위원, 일간지 문화부기자,
경기도 공무원교육원 겸임교수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JTBC 드라마 '품위있는그녀' 원작소설 1,2와
예술치유 에세이 '마음아 이제 놓아줄게' 등이 있으며,
조선일보 조선 PUB에 문화 칼럼을 연재,
스카이데일리에 ‘초대받은 여자’ 장편소설을 연재했다.
*이경희 작가의 오피니언 ‘전문가의 시선’ 코너에서는
책과 영화, 음악, 드라마 등등의 작품과 더불어 종교와 역사 이야기를 더해 소소한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