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피아노처럼 하프에도 페달 같은 게 있어서 음에 따라 오른쪽 발로 밟아가면서 연주를 하는데 그 모습이 악기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마치 숭고한 노동을 하는 것 같았어. 꼭 우리 옛날 여인네들이 물레를 잣는 모습이랄까. 직접 물레를 돌리는 모습을 본 적도 없는데 왜 그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어. 내가 앉은자리가 객석의 중앙 쪽이라서 폭 넓은 치마를 입고 다리를 벌리고 앉은 아내를 정면으로 보고 있었는데..”
형직이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더니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웃는 얼굴로 앞을 주시하며 이야기를 듣던 우명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운전석으로 돌렸다.
“ 우명씨 나, 늘 마음에 걸리던 게 있어.”
갑자기 형직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움찔, 우명은 긴장을 한다. 설마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우명은 숨이 턱 막히면서 가슴이 죄어왔다.
“그날 병원에서... 우명씨 수술실로 들어갔을 때..”
맞았다. 바로 그 이야기였다. 언젠가 한 번은 서로 이야기하고 넘어가야할 일이라 생각은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를 지금 형직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우명은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돌려 형직을 쳐다보았다.
“그만해줘. 형직씨, 나 그 일 잊은 지 오래됐어.”
우명의 목소리에 습기가 차 올랐다.
형직이 오른쪽 깜박이를 켜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우명씨한테 꼭 말하고 싶은 게 있었어. 그 동안의 세월이 얼마가 흘렀든 간에 우명씨를 다시 만나면 반드시 말하고 말 거라고 마음먹었었어.”
“그만해. 그만해. 그만 하라구. 제발 좀 그만 하란 말이야, 제발!”
우명은 몸을 떨면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날이었다. 빨간 원피스를 즐겨 입던 우명이 병원으로 실려 가던 바로 그날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날은 전달부터 시작한 크로키 레슨이 있는 날이었다.
학원을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133번을 탄다는 게 138번을 타고 말았다. 우명이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차는 자신의 행선지와 전혀 다른 곳을 달리고 있었다. 우명은 어쩔 수 없이 아무 곳에서나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내려야만 했다.
어떤 일이건 지나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드는 법이다. 운명이란 이미 정해진 것이고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란 절대 없다, 가로. 모든 것은 어떠한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미리 짜 맞추듯 이미 예정돼있었던 거라고.
하필이면 아무 곳이라 생각하고 내린 버스 정류장에 해기의 집으로 가는 86번 버스가 정차를 했다. 아주 짧은 순간 우명은 무언가를 감지했었다. 이건 분명 운명이야, 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운명의 여신은 자신의 편이었고 우명은 운명의 여신에게 선택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크로키 레슨을 마치고 우명은 어머니의 가게에 들르기로 되어있었다. 곧 여름방학이라 어머니는 졸업 전에 우명을 약혼식이라도 올리게 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학기 중에도 몇 번이나 맞선 보기를 강요했었고 우명은 번번이 방학이나 하면 하겠다고 시간을 미루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일요일이면 우명을 가게로 불러냈다. 옷이나 구두, 핸드백 등을 보러 백화점을 가거나 유명 미장원을 데리고 다녔다. 남자들은 이런 무늬를 좋아한단다, 혹은 이런 옷은 너무 요란해서 어른들이 싫어한다, 라며 우명의 맞선이나 혼사를 염두에 두고서 물건을 골랐다.
우명은 어머니를 속이는 기분도 싫었고 해기를 속이는 듯한 느낌은 더욱 싫었다. 아무래도 해기를 어머니에게 소개를 시켜야 했다. 그래서 적당한 날을 잡았다.
우명은 그날 크로키 레슨을 마치고 어머니와 미장원을 다녀온 후 해기와 셋이서 이른 저녁을 먹을 예정이었다. 어머니에게는 미장원에서 기분 좋게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다.
우명은 86번 버스를 탔다.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한 원래의 약속보다 적어도 다섯 시간은 앞서 있었다. 깜짝 놀랄 해기의 표정을 생각하니 웃음이 삐죽삐죽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