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회
이른 시간이었지만 도연은 서둘러 제작실을 나왔다. 다음 주부터는 개편 방송 때문에 한동안 정신없이 바빠질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한가할 때 쉬어 놓지 않으면 몸으로 버티기가 힘들어진다는 건 4년 방송국 생활에서 얻어진 경험이었다. 그를 만나고 돌아갈까 아니면 현주를 만나러 갈까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승강기 안에서도 도연은 잠시 망설인다.
낮에 만났을 때 그는 저녁에 아파트로 오겠다는 말을 하지않았었다. 만나고 들어가야지. 현주는 주말에 시간이 날 테니까 그때 만나면 될 것이었다. 전화를 하려고 핸드폰을 꺼내 드는데 바로 신호음이 울렸다.
“나예요. 방송국 뒷문 앞 도로에 있어요. 차는 방송국 주차장에 두고 그냥 나와요.”
“ 무슨 일 있어요? 방송국까지 어떻게?”
도연이 타자마자 차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방송국에 전화해서 사흘 동안 휴가 내겠다고 말해요.”
휴가라니요? 도연은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낮에 같이 점심을 먹었을 때도 그런 말은 전혀 없었다. 그는 옆눈으로 도연을 슬쩍 돌아보더니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음을 웃었다.
“어서 해봐요 전화.”
“왜요, 무슨 일인데요..”
한번도 그의 이런 모습을 본 일이 없다. 도연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휴가라니.... 그는 한손으로 번호버튼을 눌러 도연의 손에 쥐어 준다.
“딱 사흘만 잠적했다 돌아온다고 이야기해요. 나한테 더이상 이유는 묻지 말고.”
꺾을 수 있는 고집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휴가? 사흘? 도연의 입에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네 제작실입니다.”
장피디였다.
“저 진도연이예요. 사흘 잠적할 거예요. 3일 후에 출근할게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못알아 들은 것처럼 저쪽은 답이 없었다. 도연은 그냥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이제 말해요. 무슨 일인지.“
신호등 앞에 차를 세운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도연의 무릎 위에 놓인 그것은 비행기표였다.
“제주행?”
도연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주도 가려구요? 하하하, 왜요? 제주도 왜 가려구요?”
도연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제주도 한 번도 안가 봤다면서요 제주도 같이 가고 싶어서요.”
웃음을 참지 못하는 도연과 달리 그는 진지했다.
“방송국 다음 주부터 개편 들어가기 때문에 무지하게 바빠요. 나중에, 정말 시간이 되면 같이 가요. 나중에 조금 편해지면요.”
웃음이 가라앉기는 했지만 도연은 금세라도 웃음이 다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큰 키만큼이나 어른같이 굴던 그에게 이런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있었다니 정말 처음이었다.
“장난...같아 보여요?”
“아니, 그게 아니라”
도연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장난 아녜요, 나도 한가한 거 아니구요. 단 며칠 만이라도 다른 거 다 잊고 둘만 좀 있고 싶었어요. 가는 곳이 제주도란 건 별 특별한 부분이 아니구요. 이제껏 살아왔던 반경에서 좀 벗어나게 하고 싶어서요. 내가 아니라, 내 옆에 앉은 사람.”
갑자기 도연의 웃음이 멎는다. 아이템을 구하고 콘티를 짜야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하지만 미리 마음먹고 벌이는 일 같아 보여서 뭐라고 덧붙일 수가 없었다.
“후... ”
도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일정, 하루 줄여서 이틀만 있다가 돌아오기로. 사흘은 아무래도 무리예요. 나 정말 사흘씩이나 여기 비워 놓으면 세상 뒤집어 질지도 몰라요. 안돼. ”
그제야 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일정은 일단 가서 정해요. 지금부턴 아무 생각하지 말고 우리 여행만 생각하죠.”
여행을 한지도 제법 되었다. 마지막으로 여행을 간게 언제였나. 아마 현주가 초등 학교를 졸업하기 전의 가을이었던 것 같다.
개편을 앞두고 지금의 국장인 당시 제작 부장이 특별 휴가를 보내 주었다. 남편 역시 특별 휴가를 내고 현주는 결석을 시켰다.
그렇게 세 사람이 간 곳은 설악산이었다. 권금성 산장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탔던 기억이 난다. 한계령 휴게소의 기울어진 검은 지붕아래서 커피를 마셨었다. 현주는 아주 오랫동안 권금성 산장과 한계령, 미시령을 못 잊어했다.
또 오자, 우리. 마지막 날 돌아오는 길에 현주는 두 사람에게 다짐을 받았다. 꼭 다시 오겠다는.
-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이경희작가 프로필
중앙일보에 장편소설 '제8요일의 남자'를 연재했으며
단편소설로는 '작약' '연의기록' '전생을 기억하는 여자' 등
다수를 발표했다.
제19대 국회의장단 연설문기획관을 지냈으며,
국회도서관 국회보 편집위원, 일간지 문화부기자,
경기도 공무원교육원 겸임교수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JTBC 드라마 '품위있는그녀' 원작소설 1,2와
예술치유 에세이 '마음아 이제 놓아줄게' 등이 있으며,
조선일보 조선 PUB에 문화 칼럼을 연재,
스카이데일리에 ‘초대받은 여자’ 장편소설을 연재했다.
*이경희 작가의 오피니언 ‘전문가의 시선’ 코너에서는
책과 영화, 음악, 드라마 등등의 작품과 더불어 종교와 역사 이야기를 더해 소소한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가 될 것입니다.